'이제모두 세월따라 흔적도 없이 변해갔지만 덕수궁 돌담길엔 아직 남아 있어요 다정히 걸어가는 연인들'
이문세의 ‘광화문연가’ 가사이다.
지방출신인 기자의 머릿속에 떠오르는 덕수궁의 이미지는 이문세 씨의 감미로운 목소리와 더해져 한 번도 본적은 없지만 기자에겐 애잔한 추억을 되새길 수 있는 장소로 각인돼 있었다.
특히 ‘광화문연가’ 가사에 등장하는 덕수궁 돌담길을 상상하며 ‘나도 연인이 생기면 손잡고 덕수궁 돌담길을 걸어봐야지’라는 원대한(?) 포부를 품기도 했을 정도로 동경의 대상이기도 했다.
이런 생각을 품었던 시기가 아마 기자가 중학생이었을 무렵이었던 것으로 기억하니, 약 10년이 넘은 지금에서야 꿈에도 그리던 덕수궁 돌담길에 들어설 수 있었다.
혼자서 걷는 돌담길에는 광화문연가 노랫말처럼 연인들이 손을 잡고 다정하게 걷고 있어 서울에서 손꼽히는 데이트코스임을 알 수가 있었다.
돌담길 중간에는 나이든 화가가 붓을 잡고 덕수궁과는 또 다른 세계를 창조하고 있어 덕수궁 돌담길의 다양한 멋을 느낄 수 있었다.
돌담길을 지나 덕수궁에 들어갔다.
대한제국의 정궁이었던 덕수궁은 당시 황제국의 위상을 드높이던 궁궐이었지만 일제에 의해 그 공간이 많이 축소돼 지금은 주변의 높은 빌딩에 둘러싸여 있다.
덕수궁 입구에는 조선시대 군복을 입은 수문장과 경비병이 창과 검을 들고 무표정하면서 근엄한 표정으로 입장객들을 맞이하고 있었다.
휴일을 맞아 아이와 함께 나들이를 나온 가족들과 소풍 온 학생들이 눈에 띄었다.
길을 따라 쭉 들어가자 조선시대 당시 왕의 즉위식이나 신하들의 하례, 외국사신의 접견 등 중요한 국가적 의식을 치르던 중화전(中和殿)이 등장했다.
중화전 앞에는 양쪽에 신하들이 직급에 맞게 도열했을 것으로 추정되는 표지석들이 늘어서 있었다.
기자는 중화전에 올라 신하들이 서 있었을 것으로 생각되는 곳을 바라보며 ‘이곳에서 즉위식을 가졌던 왕들은 어떤 기분이었을까?’라는 물음을 속으로 던지며 망상에 잠겼다.
1907년 네덜란드 헤이그에서 열린 제2차 만국평화회의에 고종은 일본과 맺은 을사늑약의 부당함을 알리고자 밀사를 파견했지만 일본의 계략으로 특사들은 회의장에 들어가보지도 못했다.
이 일로 일제는 고종에게 여러 차례 양위를 강요했고, 결국 고종은 순종에게 대리청정을 명한다. 그러나 일제는 여기서 그치지 않고, 순종을 대리청정에서 양위로 바꿔 양위식을 1907년 7월 19일 바로 이곳 중화전에서 치르게 한다.(고종과 순종은 이 양위식에 참석하지 않았고 환관 두 명이 대역으로 양위식을 치뤘다.)
일제로 인한 아픔을 간직한 이곳에 일본인들이 관광으로 와서 기념사진을 찍는 모습이 왠지 아이러니했다.
중화전 뒤로 위치한 즉조당(卽阼堂) 일원은 일반 가정집 같이 소박한 건물 앞에 잔디밭이 꾸며져 있어 나름의 정취를 느낄 수 있었다.
즉조당 일원은 임진왜란 당시 선조가 임시로 거처했던 곳으로 지금의 덕수궁의 모태가 된 건물이다. 즉조당 양 옆으로는 황제가 업무를 보던 준명당(俊明堂)과 선조의 계비인 인목왕후 김씨가 10여년간 감금생활을 했던 석어당(昔御堂)이 존재했다.
즉조당 인원에서 오른쪽으로 이동하면 함녕전(咸寧殿)과 덕홍전(德弘殿)이 나타난다.
함녕전은 고종의 환어와 함께 1897년에 건립된 왕의 침전이었다. 덕홍전은 명성황후의 혼전으로 사용되던 경효전이 위치했던 곳으로, 고종이 고위 관료와 외교 사절을 맞이하는 접견실로 사용됐다.
함녕전에는 1897년 고종의 침전과 정부 각 부처를 연결하는 ‘대청 전화’가 설치됐었는데 고종이 김구의 사형집행 서류를 검토 중 형 집행 직전에 전화로 사형집행정지 명령을 내려 목숨을 구했다는 일화가 ‘백범일지’에 기록돼 있다.
함녕전과 덕홍전 뒤로 이동을 하면 고종이 커피를 마시며 외교사절들과 연회를 즐겼다는 정관헌(靜觀軒)이 있다.
정관헌에는 화려한 장식과 서양식 테이블이 가운데 놓여 있어 한가로이 커피를 마시며 고뇌하고 있는 고종의 모습을 상상하게끔 했다.
덕수궁 내 서양식 건축물인 석조전(石造殿)은 아쉽게도 내부공사 중이라 들어갈 수 없어 멀리서 건물 외관만을 볼 수밖에 없었다.
대한제국 근대화의 일환으로 지어졌다고 하는 석조전을 바라보며 이곳이 지금의 청와대가 되지 못한 것이 못내 아쉬웠다.
기자는 덕수궁 관람을 마치고 나서는 길에서 대한제국의 희망찬 내일의 꿈과 아픔을 동시에 간직하고 있는 덕수궁의 마지막 실루엣을 바라보며, 더 이상 절망이 아닌 희망을 펼쳐보이는 대한민국의 역사가 이뤄지길 간절히 바랐다.